.아침 7시

이젠 알람시계의 도움 없이도 저절로 눈이 떠진다.

새벽에 들어온 남편은 곤한 잠에 빠져 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나 샤워를 한 후 건너 방에서 자고 있는 딸을 깨워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행여 이른 아침까지 일하고  들어온 남편을 깨울까 조심하며 딸을 씻기고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그렇게 분주히 준비를 끝내고 현관문을 나서면 싱그러운 아침이 우리를 맞이한다.

6월 중순이지만 약간은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것이 전형적인 캘거리의 날씨다.

차에 올라타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직장으로 향한다. 서울 면적과 비슷한 캘거리지만 인구가 서울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곳이라 출근시간인데도 러시아워 없는 비교적 한적한 도로를 달려 10 분만에 우리 딸이 다니는 daycare에 도착한다. 

그렇게 딸을 daycare로 들여보내고 바로 옆 블록에 있는 쇼핑센터 안에 자리잡은 직장으로 출근하면 먼저 출근한 파란 눈의 직장 동료가 good morning, Gina.하며 인사를 건넨다.(Gina는 나의 영어 이름이다.)

이렇게 또다시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시간이 약이다 라는 말이 있던가 요즘 들어 나는 이 말을 절실히 실감한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괴로워 하고 힘들어 했던 우리 가족 남편의 실직과 기울어 가는 가정형편에 첫 돌을 갓 넘긴 딸아이를 시부모님 댁에 맡기고 하루 10시간 이상의 근무 시간으로 몸과 마음이 점점 황폐해져 가던 그 때, 간신히 재취업했던 일자리를 한 달 만에 잃은 남편이 불쑥 캐나다로의 이민에 대한 말을 꺼냈다.

그 이전에도 캐나다 이민에 관한 계획은 있었지만 삶에 쫓겨 그 어떤 구체적인 행동과 준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저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남편이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심정으로 캐나다로의 이민을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본격적으로 캐나다로의 이민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지만 그 앞에 닥친 현실은 좌절에 가까웠다. 투자이민은 말할 것도 없고 독립이민 조차도 여러 가지 면에서 적정 점수에 도달하지 못했다. 사범대를 졸업한 우리 남편(영어도 전혀 못하고 기술은 없고 자격증도 교원 자격증만 가지고 있는)을 이민 주체로 하다 보니 기본 점수에도 한참을 못 미쳤던 것이다.

그 때 10년 전부터 캐나다에서 살고 있던 친구가 이민의 주체를 남편이 아닌 나로 바꾸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해왔다. 미용사라는 직업이 캐나다 기술이민을 할 수 있는 직업군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용사로 기술이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 영어가 가장 큰 문제였다. 영어가 안되니 결국엔 한국인이 운영하는 미용실을 알아봐야 했지만 주위에서 충고하는 바로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은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딜레마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하지만 방법은 없었다. 아니면 방법을 몰랐던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계속 시간은 가고 우리 가족의 형편은 점점 나빠져 가고..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계속 안 좋은 일만 당하고..

그래서 결국엔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을 택하기로 했다. 여기저기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일단 취업비자 없이 취업해서 일을 시작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고용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불법취업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러 미용 사이트를 검색하여 캐나다 현지에서 한국인 미용사를 구하는 고용주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이곳 저곳 연락하고 있다가 우연히 산업인력 관리 공단의 구인 광고를 보게 되었다. 캐나다 현지의 미용회사에서 한국인 미용사를 공개 채용한다는 광고였다. 실기 시험과 면접을 미용회사의 CEO가 직접 한국에 와서 주관한다는 것이었다. 그 회사의 이름은 CHATTERS HAIR SALONS CANADA. 알아보니 캐나다 전역에 체인망을 가지고 있는 꽤나 큰 회사였다. 직감적으로 바로 이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자신이 있었다. 내 미용사 경력도 15년 이상이었고 주위로부터도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걸리는 문제는 영어였다. 면접을 포함한 모든 입사 전형과정을 영어로 하기 때문에 상당한 영어 실력을 필요로 할게 뻔했다. 그러나 나의 영어 실력은 거의  백지 상태라고 하는 게 맞을 정도였으므로 상당한 압박감과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전도 해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밑져야 본전 아니던가? 일단 지원하기로 마음먹고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면접일은 다가왔고 나는 수 많은 지원자들 틈에서 한없이 위축되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정말 나 빼놓고 다들 영어를 잘하는 것 같았다 . 게 중에는 미군 부대에서 일하던 사람도 있었고 특급 호텔 미용실에서 일하던 사람, 미국 유학파와 미국과 캐나다 현지에서 몇 년씩 일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 비해 나는 완전히 영어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기죽지 않고 나는 실기시험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실기시험 당일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크리에이티브적인 능력을 최대한 끌어 올리려고 노력했다.

후회 없는 실기시험을 마친 후 결과 발표가 있을 때까지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같이 시험 볼 때 알게 된 다른 미용사들의 합격 소식이 하나 둘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역시내 예상대로 오리엔테이션과 면접 때 눈부신 영어 실력을 자랑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렸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떨어졌구나……..

그 며칠 간 정말 나 자신에 대해 실망을 많이 했고 좌절했으며 하루 하루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나 둘 다 절망감에 젖어있던 순간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 공개채용을 대행해서 진행하던 이주공사의 담당자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최종 선발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내 실기시험 결과는 매우 만족스럽고 훌륭하지만 영어 때문에 많이 망설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합격자를 결정하는데 나와 다른 한 사람을 놓고(그 사람은 영어는 매우 잘하는데 실기 점수가 별로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심사숙고를 하다가 결국엔 나를 택했다는 것이었다.

합격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연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를 반복했다. 전화를 끊고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남편과 부둥켜 안고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이젠 다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합격에는 조건과 단서가 붙었다. 출국 전까지 캐나다에서 일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을 수준까지 영어 실력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만약 전혀 영어실력의 향상이 없을 시 합격취소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 때부터 나의 영어 완전 복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모든 가정경제를 혼자 떠안고 있었으므로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고 있었던 터라 몸도 마음도 많이 상해 있었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어회화학원을 다녔다. 처음 접해보는 외국인 강사와 함께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웬만해선 친해지기를 거부해 왔던 영어로 대화한다는 게 처음엔 상당한 거부감과 위화감이 있었지만 이걸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 가족의 미래는 없다라는 생각에 아무리 힘들고 짜증나더라도 참고 견디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근 1년을 보낸 후 2007년 8월 7, 눈물로 우리 식구를 배웅하는 시부모님의 모습을 뒤로하고 드디어 캐나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캐나다로 기수를 정하는 그 순간까지 나는 만감이 교차했지만 걱정보다는 기대감과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1년 동안 정말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왔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고 그만큼 영어 회화에도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3시간의 비행 후 캘거리에 도착한 후 회사 직원들과 만나보니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고 고작 한 말이라곤 hello가 전부였다. 어쨌든 회사 측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 도착해서 간단한 짐을 풀고 보니 갑자기 막막한 기분이 밀려왔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자신감이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가족이라는 것이 이 머나먼 타국에서 이토록 위안이 되는 존재라는 것에 새삼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캘거리에 도착한 첫 주는 회사 직원들의 도움으로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사고 차를 사는 등 이 곳에서의 생활을 준비하는데 보냈다. (차에 대해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가진 돈을 다 털어서 산 중고차가 산 지 이틀 만에 고장나서 어쩔 수 없이 폐차를 시켜야 했고 그 것 때문에 몇 달 동안 상당히 궁핍하고 어렵게 생활해야만 했다.큰 경험이었다.)

도착한 주로부터 다음 주 월요일.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었다. 모든 교육과정은 당연히 영어로 이루어졌다. 말 그대로 통역관 한 사람 없이 우리 모두를 영어 숙달자로 간주한 교육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솔직히 30%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질문도 자주하고 상당히 의욕적으로 교육에 임했지만 30%도 알아듣기 힘들었던 나는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간신히 교육을 따라가야 하는 곤욕을 치뤄야만 했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사용하는 전문용어들 대부분이 한국과 그리 다르지 않았고 그 동안 쌓아왔던 미용지식들이 있었기에 큰 무리 없이 교육을 마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 수 있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첫 근무를 시작했다. 캘거리의 치눅몰 안에 있는 지점으로 배치 받아 첫 고객과 만나게 되었을 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또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만큼 그 당시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웃음이 지어진다. 어쨌든 첫 고객을 무사히 끝냈을 때의 안도감이란 학교시험을 끝냈을 때의 기분과도 흡사했다. 그 이후로 그렇게 한 명 두 명 고객을 대하고 만나면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어떻게든 이해해서 그들이 만족하게끔 노력해 가다 보니 모든 기술은 결국엔 어디에서든 통한다는 걸 실감했다. 비록 내가 영어를 아주 잘하진 못하지만 고객이 원하는 스타일만 제대로 캐치할 수만 있다면 일단은 절반의 성공인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많이 나아졌지만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받은 영어로 인한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객과의 교감은 친근한 대화로부터 비롯되는데 인사말 정도와 간단 명료한 짧은 문장의 영어만으로는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이 무척 아쉽고 힘들었다. 가령 시술 중 어떤 문제에 봉착 했을 때, 고객이 클레임을 걸 때나 고객을 설득해야 할 때 한국어로는 설명을 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영어로 설명해야 하니 아는 단어에는 한계가 있고 입은 꼭 붙어서 선뜻 떨어지지도 않고 그저 멀뚱멀뚱 진땀만 빼고 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영어 때문에 오해도 자주 생겼고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화 도중 행여나 잘못된 단어를 선택하진 않았나, 문법이 틀리진 않았나 항상 노심초사하게 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제대로 항의 한 번 못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 몸을 사리고 위축되면 진전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아무런 발전도 없을 게 뻔했다. 그래서 틀린 문법이든 잘못된 단어든 개의치 않고 어떡하든 상대방에게 의사를 전달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면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 열 번이든 개의치 않고 되물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그런 나를 이해하고 상대방이 먼저 다가와 주는 것이었다.

네가 말하는 게 이런 것이냐? 이런 뜻으로 말한 것이냐?라며 친절하게 되물어 주고 확인해 주었다. 여기에서 나는 캐나다의 국민성을 어렴풋이나마 느꼈다. 이곳에는 남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있는 사람들이 많다. 간혹 내가 이해를 잘 못하면 쉬운 말로 다시 설명하고 지적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내 자신이 먼저 마음을 굳게 먹고 상대방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자신의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이 곳 사람들은 남들이 먼저 도움을 청하기 전까지는 결코 먼저 다가오지 않는 듯 하다.

어쨌든 그렇게 고군분투 하는 동안 어느 시점부터 점점 귀가 열리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고객과의 대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영어가 더 이상 스트레스의 주범이 되는 일이 거의 없어져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영어 때문에 겪는 불편은 거의 없어져 갔다.

지금의 내 영어는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나 감히 말하지만 이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정말 눈물 나게 무던히도 노력했고 정말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나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책망하며, 때론 위로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매장 분위기에 익숙해져 갈 때쯤 커다란 숙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캐나다에서 헤어스타일리스트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캐나다에서 발행하는 자격증이 꼭 있어야 했다. 쉽게 말해 한국 자격증은 쓸모 없는 종이조각에 불과하니 일하고 싶으면 다시 현지 자격증을 따라는 것이었다.

회사와의 계약에도 6개월 안에 자격증을 못 따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하늘이 무너져도 자격증은 꼭 취득해야만 했다.

회사 측에서 잡아준 일정대로 자격증 시험을 보기 위해 맹렬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필기 시험을 보기 전에 먼저 실기 시험을 봤지만 너무도 가뿐하게 통과! 그러나 실기시험 이후에 본 필기시험은 2% 차이로 아깝게 탈락. 전체 문항의 70%가 커트 라인이었는데 내가 획득한 점수는 68%였다.

첫 번째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정말 막막했다. 나름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는데 역시 영어가 문제였다. 시험 볼 때 옆에서 통역해 주는 분이 있었지만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전문용어가 너무 많았고 심지어는 통역해주는 분이 오히려 이 단어는 무슨 뜻이죠?라며 내게 되물어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통역관의 조건이 미용과는 일말의 관련도 없는 사람이어야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오로지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만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야 했다.

두 번째 시험은 진짜 피눈물 나게 공부했다. 그렇게 해서 두 번째 필기 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6개월의 비자 만료를 일주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정말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고 큰 고비 하나를 넘겼다는 안도감과 6개월짜리 취업비자가 2년짜리로 연장되었을 때(6개월 안에 자격증 취득 이후 2년으로 연장한다는 계약조건이었다)에는 그 동안 이 시험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2007년을 보내고 2008년을 맞이했다.

일하는 것은 점점 안정되어가고 있었고 직장 동료들과의 유대감도 생겼다. 남편 또한 낮에는 피아노 레슨과 미술 레슨으로, 밤에는 신문 배달 일로 가계에 큰 보탬이 되고 있었다. 생활은 점점 안정되어가고 있었고 우리 딸 아이도 즐겁게 어린이 집을 다니며 친구들도 사귀고 영어도 곧잘 할 수 있게 되었다.

1년 정도가 지나면서 세계는 하나다 라는 것을 실감했다. 피부색과 언어는 다르지만 그들 역시 예쁘고 보기 좋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고객들이 내가 공들여서 해준 스타일에 만족하면 정말 행복한 표현을 스스럼없이 한다. 나에게도 그 순간은 매우 행복한 순간이다. 물론 나의 영어가 많이 부족하지만 고객의 말에 열심히 귀 기울이면 고객이 원하는 바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역시 나는 미용사였다.

미용사는 고객을 만족 시키는 서비스맨이면서도 고객의 문제점을 원활히 해결해 주는 해결사이기도 한 것이다. 가끔 고객과의 대화가 부족해서, 예를 들면 동유럽이나 동남아 출신 고객인 경우 발음상 알아듣기 힘든 부분이 너무 많았는데 그럴 경우에 오는 문제점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넘을 수 없는 산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융통성 있게 처리할 수 있는 요령이 생겼다.

여태껏 계속 강조했었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영어가 가장 중요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아무리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부족하다. 모든 문제는 영어로 시작해서 영어로 끝난다. 아무리 난처하고 힘든 일이 닥쳐도 의사소통의 노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이 곳 사람들의 성향이 아무리 지극히 개인적이고 타인에 대해 배타적이라 해도 논리적이고 타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수긍하고 인정해줬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 이상 수준의 영어 실력이 필수인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이 곳 생활에 적응을 해 갈 때쯤 KBS로부터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았다. VJ특공대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성공적인 해외 취업 사례를 주제로 기획하던 중에 산업인력 관리공단으로부터 나를 소개 받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그런 사례가 아니라는 생각에 거절했지만 남편의 적극적인 촬영의지와(방송출연이 평생의 꿈이었다고 한다 ㅋㅋㅋ) 해외 취업을 생각하는 다른 많은 미용사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다. 촬영 당일 본사에서도 인터뷰를 위해 총 책임 매니저도 오고 다른 직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방송출연의 가장 큰 기쁨은 우리 가족의 모습을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공영방송의 인지도 높은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금년 4, 비교적 순탄하고 빠르게 영주권도 획득할 수 있었다. 캐나다 내에서도 큰 기업인 본사의 보증과 정직하고 일 처리에 확실한 현지 이주공사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일인데 영주권을 받지 못하고 몇 년 째 고생하고 있는 이곳의 다른 한인들을 보면 정말 큰 숙제 하나를 해결한 느낌이었다.

이제는 정말 꾸준히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앞으로만 전진하면 되는 시점이 되었다.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시행착오와 은근한 인종차별도 없지는 않지만 캐나다에서의 우리 가족의 앞날은 희망적이다. 2년 동안 생활하면서 이사도 무려 5번이나 다니고 차도 7번이나 바꿨다. 그렇게 여러 번의 이사와 차를 바꾸면서 집은 점점 넓어져 가고 차의 나이도 점점 젊어져 갔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차도 2대 중의 한 대는 새 차다. 새 차를 살 수 있었던 것도 영주권을 받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새 차 같은 경우 비영주권자에게는 현금으로 사지 않는 한 파이넨싱(할부) 자체가 매우 어렵다.) 이렇게 조금씩이나마 생활이 윤택해져 가는 우리 가족을 보며 정말 시간이 약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2년 동안의 캐나다 생활을 정리하자면 열심히 노력하면 그만큼의 대가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큼 잃는 것도 많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던 남편도 비록 새벽에 하는 힘든 일이지만 한국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높은 보수를 받으며 나름 만족하고 있다. 새벽까지 일하고 들어와 얼마 자지도 못하고 일어나자 마자 이 곳 아이들에게 피아노와 미술을 가르치려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남편의 전공은 미술교육이며 한국에서는 작곡가와 연주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분명 쉽지는 않은 일일 텐데도 클래스를 좀 더 늘리려고 노력하는 남편 모습을 보면 안스럽기도 하지만 미덥고 듬직하기도 하다. 게다가 캐너디언들과 1년 넘게 일하면서 조금씩 늘어가는 영어에 스스로도 대견스러운지 자랑을 늘어 놓는 모습을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한국에 있을 때 힘들어 하며 좌절하던 남편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아련해 온다.

그리고 해외취업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께 드리고 싶은 당부는 지름길이나 편법은 없다는 것이다. 정도로 차근차근 걷다 보면 언젠가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노력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은 정말 옳은 말이다. 또한 앞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영어에 있다.

나도 그리 이르지만은 않은 나이에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차곡차곡 돈을 모아 집을 사는 것이 일단은 첫 번째 목표이며 둘째를 가지는 것도 목표이다. 그리고 우리 딸과 앞으로 태어나게 될지도 모를 둘째 아이를 정말 번듯하고 착하게 키우는 것 또한 가장 큰 목표이다. 우리 가족은 그 모든 목표를 향해 이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바로 그 때이다.

망설이지 말고 시작하면 된다. 우리 가족의 경우 운도 많이 따랐지만 그만큼의 노력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끝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용기와 위안을 주셨기에 우리 가족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힘들거나 지칠 대마다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지금 캐나다는 캠핑의 시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캘거리는 유명한 캐너디언 록키로부터 한 시간 거리다. 영국 BBC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중에 한 곳으로 선정한 레이크 루이스도 그 안에 있다. 한국 산과는 또 다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록키 산맥을 우리 남편은 너무나도 사랑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그 곳으로 캠핑을 떠난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뛰어 노는 우리 딸을 보며 다시 한 번 이 곳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소중한 우리 가족!

지금처럼 서로에게 의지하며 사랑하며 살 것이다.

예전에 대기업의 총수가 했던 말을 빌어 이 글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