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paration- Do you think you are pretty? (너는 네가 예쁘다고 생각하니?) well, I don't think that I'm pretty, but old people - over 40's love my appearance, because I have big ears like this. (딱히 예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나이 드신 분들이 내 외모를 좋아하셨어. 왜냐하면, 보다시피 내 귀가 굉장히 크거든) 그러면서 나는 면접을 위해 정성껏 드라이한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얼굴을 돌려서 나의 큰 귀를 보여줬다. 면접관들의 깜짝 놀란 눈과 뒤이은 호탕한 웃음을 난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 사실 어려서부터 큰 귀는 나에게 콤플렉스여서 늘 부끄러워만 했었기에 면접에서 귀를 보여주기란 사실 큰 용기가 필요했었다.
곧이어 부가적인 설명을 더했더니, 면접관들은 의외로 크게 웃으며 내 대답에 만족 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매일 체중조절을 위해 러닝머신 위를 두 시간 넘게 달렸다. 앞에 달린 거울을 보며 미소연습을 하며, 동시에 영어인터뷰를 위해 외운 답변들을 연습해 보았다. 하루 4시간의 인터뷰수업이 끝난 뒤 혼자서 연습을 3시간. 그 외의 깨어있는 모든 시간에도 내 머리 속에는 인터뷰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미소를 띤 채 러닝머신을 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헬스장의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렇게 준비를 시작한지 정확히 세달 째에 들어설 때, 드디어 에미레이트 항공 7기 공채가 시작되었다. 두바이에 베이스를 둔 에미레이트항공은 타 항공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급여와 복지가 한국에까지 잘 알려져 있어서, 당시 승무원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꿈의 항공사로 여겨졌었다. 물론 나의 목표 항공사이기도 했으며, 모든 국비생들의 꿈이었다.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어린나이, 짧은 일 경험, 부족한 영어실력. 나는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 할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승무원이라는 꿈을 꾸는 사람의 열정이. 인도와 동유럽국가에서 온 면접관들에게도 그러한 나의 열정이 보였었나보다. 약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된 면접에서 나는 2년 동안 계속해온 대한축구협회 티켓부스에서 월드컵을 비롯하여 다양한 축구경기의 표를 판매하며 얻은 고객을 대하는 방법 등을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러한 나의 일 경험은 열정과 합쳐져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나의 영어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했다. 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깐 동안 이었지만 망설였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곧 “ Yes, I know my English is not enough at this moment, but I know what is the problem of my English" (나의 영어가 부족한건 알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기가 죽은 모습을 보이는 대신 수긍하는 자세로 대답하는 나를 보며 그들은 깜짝 놀라더니 내 영어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Vocabularies. And even I know how to develop it. My host mom in Canada, she suggested me to improve my English by reading newspapers and magazines. (어휘가 부족하다. 나는 그러나 어떻게 해결할지 알고 있다. 캐나다에서 나의 하숙집아주머니는 나에게 부족한 어휘를 신문이나 잡지를 읽으면서 발전시키라고 충고해준 적이 있어.) 면접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나의 영어가 부족하지만 더 발전시킬 의지가 있고 그 의지의 장으로 두바이가 되는 것을 기다려온 바이기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두바이로 떠나는 날까지 영어 공부하고 있으라는 조언까지 해 주었고, 그 때문에 나는 합격을 확신할 수 있었다.
두바이로 떠나 던 2월 9일은 설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다. 가족들을 뒤로하고 떠나던 그 마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복잡한 심정이었다. 홍콩과 방콕을 경유해 두바이까지 가는데 걸린 12시간 남짓. 그 시간은 같은 입사자 2명과 함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가기에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더욱이 우리가 만난 현직 승무원들은 함께 사진을 찍어 우리의 미래에 행운을 비는 글귀를 적어 주기도 하고, 샴페인을 가져오기도 하고, 각종 기념품을 가져다주는 등 잊을 수 없는 환영 파티를 해주었기에 더욱 짧게만 느껴졌다. 이날 찍은 사진과 기념품들은 훗날 비행으로 몸과 마음이 지칠 때 마다 초심을 떠올릴 수 있게 나를 도와주었다. 드디어 두바이에 공항에 도착!! 마중을 나온 가이드와 함께 공항에서 15분 정도를 회사차를 타고 달려왔더니 황량한 대지에 홀로 세워진 으리으리한 빌딩 하나가 보였다. 지상 26층의 건물로 내가 배정 받은 건 6층. 반짝반짝 대리석 바닥에 커다란 침대. 옷장, 화장대, 그리고 생필품이 담겨진 웰컴팩까지!!! 모든 것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밖을 내다보니 높은 건물 숲 사이로 모래바닥이 곳곳에 눈에 띄기도 했고 이슬람 사원의 지붕이 내려다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낯선 바깥 광경을 구경하다가 지친 몸으로 쓰러져 잔 것이 내 두바이 생활을 첫 날 이었다.
6주간의 교육이 끝나고 시작된 비행생활. 하루하루가 신기함의 연속이었다. 서비스교육기간에 배운 영국영어의 우아한 억양을 내가 흉내를 내는 모습이 스스로 보기에도 대견하고, 그 억양을 알아듣는 손님 또한 신기했다. 사소한 부탁이라도 들어주고 나면 항상 감사함을 표시하는 “THANK YOU!!"를 외치는 손님이 나로서는 낯선 감이 없지 않았지만, 무척 고맙기도 했다. 나는 당연한 나의 일을 하는 것인데 그 서비스를 감사하게 여긴다는 게 오히려 내가 고마워지게 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모르는 게 많아서 어리둥절하던 적도 있었지만 비슷한 상황이 자꾸 생기는 것을 관찰하고 또 친절한 동료들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내는 그들만의 노하우를 알려주기 시작하면서 점점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어 손님들과 대화를 시작했고, 손님의 필요를 굳이 말이 아닌 얼굴 표정만으로도 짐작 할 수 있게 되었다. 손님의 요구사항을 잊지 않도록 조그만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일일이 메모를 하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고, 그 수첩의 수는 하나 둘씩 늘어만 갔다. 그런 나의 태도를 많은 동료와 손님들이 칭찬해 주었고, 그 칭찬은 나를 더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이미 나보다 먼저 회사에 입사한 1~6기 한국인 승무원들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에 내가 편승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쁨이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선배들보다 더 좋은 한국인이 되기 위해, 스스로의 목표였던 프로 서비스업종사자로서의 길을 걷는 한순간 한순간이 즐겁기만 했다.
일에 있어서는 한없이 프로다운 나였지만 한국에 대한 그리움, 한국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비행을 마치고 텅 빈 숙소로 들어올 때 마다 지울 수 없는 아픔 이었다. 같은 건물에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 동료들이 있긴 했지만 비행시간이 맞지 않으면 한 달 동안이나 얼굴을 못 마주칠 일도 흔히 있었으니, 외로움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다고 할 수 있겠다. 비행을 시작한지 채 3개월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비행시간 약 40분밖에 걸리지 않는 바레인 비행을 갔었다. 나는 얼굴도 유난히 한국인처럼 생기기도 했지만, 다른 한국인 동료들이 외국인 손님과 동료를 배려하여 외국 이름을 이름표에 새긴 것 과는 달리 한국 이름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한 나의 한국이름을 불러주신 첫 한국 승객을 그 비행에서 만난 것이다. 서로가 한국인임을 확인하고 나자, 손님이 내게 말을 건넸다. “두바이에서 밥은 잘 챙겨 드십니까? 그저 짧은 인사말일 뿐인데 예상치도 못하게 순간 눈물이 왈칵 날 뻔했다. 한국말로 이 짧은 안부 인사를 듣는 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이 뭉클 해 지는 경험인지 그제 서야 처음 알았다. 그것도 낯선 타인에게서. “그럼요. 딱 보셔도 건강해 보이잖아요? 아주 잘 먹고 열심히 일하지요.” “중동이란 지역이 사실 일하기 편한 환경은 아니지만, 건강 보살피며 즐겁게 일 하세요. 젊어서 이렇게 열심히 일한 대가가 꼭 있을 겁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 말씀을 해주고 나가시던 그 손님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반가움. 같은 민족에 대한 배려. 따뜻한 격려. 그 뒤로 나는 한국인임이 더 자랑스러워졌다.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게 사명처럼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뒤로는 한국 손님을 만나게 되면 내가 먼저 다가가 힘든 타국 생활을 하시는 손님들께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더 많은 서비스를 해드리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한국인 승무원의 뛰어난 근로능력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회사 안에서 좋은 편이었지만,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회사 사람들이 알아가기 시작한 건 두바이-인천 노선이 생기긴 시작한 2005년 5월 이후 부터였다. 입사한지 정확히 3개월이 되던 5월 10일. 나는 너무나 운이 좋게도 한국 비행을 하게 되었다. 이날은 나에게 있어 한국이라는 나라가 회사 사람들에게 얼마나 발전된 나라인지 보일 수 있는 자랑스러운 날이었고 또한 스스로도 큰 뉘우침을 하게 된 뜻 깊은 날이 되었다. 한국에서 우리 승무원들이 머무른 숙소가 한국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강남대로에 위치한 덕분에 다른 나라에서 온 승무원들은 숙소로 가는 길에 가장 도시화된 한국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고작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라는 것만 알던 외국인 승무원들도 실제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의 소비물가와 생활수준을 보고 나서는 한국을 경제적으로도 많이 발전된 나라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 같았다. 그들이 놀라는 모습에 기분이 뿌듯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 자신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매일 영어를 쓰던 생활에 젖어 있던 터라 간단한 기내용품과 시설에 대한 단어도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먼저 나와 버리는 것이 바로 문제였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과 두바이로 다시 돌아오는 두 번의 비행에서 나는 한국 손님들께 그야말로 부끄러운 서비스를 제공 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회사에서 실시한 한국어 교육을 통해 한국어로 손님께 서비스하는 방법을 배우고 나니 특히나 영어가 익숙하지 않으신 연세 많으신 한국 손님을 대하는 게 훨씬 자연스러워 졌다. 이 일을 통해 역시 사람은 깨닫고 뉘우치는 바가 있어야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확히 2년 반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비행과 그때 만난 수많은 손님들. 그중에 셀 수 없이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모습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많지 않은 장애인 승객들의 탑승이었다. 그중에서도 맨체스터 비행을 가면서 만난 한 남자 승객이 준 감동은 잊을 수 없고, 우리나라도 어서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 달라져서 장애인들이 밖으로 나와 많은 활동을 하길 바라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손님은 나이가 삼십대에 건장한 남자 손님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편의로 가장 먼저 탑승 할 수 있도록 항공사에서 배려를 하고 있는데, 휠체어를 타고 가장먼저 나타난 그가, 그날 맨체스터 비행의 첫 손님이었다. 비행기 입구에서는 지상 직원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서 내렸는데, 하반신이 완전히 절단된 몸이었다. 그 모습에 놀란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라는 망설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손님이 큰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Hi!” 깜짝 놀란 내 입에서 반사적으로 인사가 나갔다. “Good morning, sir? May I help you? Do you want me to bring your bag down to your seat?" (안녕하세요? 손님, 제가 손님 가방을 좌석까지 가지고 갈까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러나 그 손님은 너무 경쾌하고 큰 목소리로 단번에 거절했다. “N0. I'm Okay." 그러고 나서는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방을 휙 던져 1~2m정도 앞까지 보낸 뒤, 양손을 발처럼 사용하여 씩씩하게 몸을 움직여 나갔다. 가방이 있는 앞까지 다다르면 다시금 가방을 던져 이동시켜 놓고 몸을 움직여 다가갔다. ‘아! 하필이면 왜 이기종일까?’ 맨체스터 비행은 우리 회사 비행기 기종 중에 서도 가장 크고 길다. 바라보는 입장만 되어도 그 길이 왜 그렇게 긴지. 안타까운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20m도 넘는 그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내려가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7시간을 그 자리에서 버틴 그 손님은 착륙 후,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내릴 때도 탑승 할 때와 정확히 같은 모습으로 가방을 던지며 몸을 이동시켜 비행기 문 앞 까지 나아갔다. 모든 승무원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의 용기에 감탄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모습은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그 손님에게서 용기를 얻은 덕택에서인지 그 뒤로 내가 만난 많은 장애손님들에게 나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더욱 많은 도움을 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변하게 된 것 같다. 많은 시각 장애인 손님을 대할 때도 이전보다 더욱 진심어린 목소리로 비행기 내부나 기내 서비스를 설명하게 되었고, 더 자주 손님의 상황을 체크하고 편의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게 되었다. 다른 어떤 몸이 불편하신 손님도 최선을 다해 보살펴 드리기 위해 노력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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