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매니지먼트는 아직 한국에서 낯선 학문이다. 나 역시 영화 '제리 맥과이어'를 보고 스포츠 매니지먼트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2002년 12월9일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바닥에서 시작하다 미국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스포츠 매니지먼트 전공"이라고 말하면 "좋은 전공을 하네요"라며 부러워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도 나처럼 스포츠 매니지먼트가 어떤 일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밝은 면만을 떠올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스포츠만 좋아하면 되는 줄 알았다. 스포츠를 사랑하는 열정이 있다면 스포츠 매니지먼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무엇보다 경험과 이론이 기본 바탕이 돼야 한다. 어릴 때부터 운동선수로 뛴 바도 없고, 대학에서 체육을 전공하지 않아서 몸으로 스포츠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스포츠에 대한 전문지식 또한 부족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스포츠 매니지먼트에 도전한 것이다. ◇열정으로 준비하다 나의 가장 큰 무기는 열정이었다. 스포츠 매니지먼트로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누구에게 지고 싶지 않았고,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처음 미국땅에 발을 디딘 곳은 플로리다 마이애미다. 한국에서 학교를 고민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한 점은 경험이었다. 앞서 밝힌 듯 스포츠에 대한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미국행 전 현장에서 통할 수 있는 실용적인 스포츠 경험을 쌓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했다. 마이애미는 연중 따뜻한 기후로 인해 미국 내에서도 대형 스포츠행사가 가장 많이 열리는 곳. 부족한 경험을 보충할 수 있는 최적 장소로 삼은 이유다. 하고 싶던 스포츠 매니지먼트 일을 시작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부풀어 올랐으나 현실은 아니었다. 바로 언어 때문이다. 2000년 어학연수를 1년간 다녀왔으나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또 1년 어학연수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미국 학생들과 똑같이 대학원 수업을 듣고, 과제를 처리하기에는 실력이 많이 부족했다. ◇언어장벽, 그리고 시련 고민할 틈이 없었다. 하루빨리 영어에 익숙해지는 게 정답이었다. 빨리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같은 학교, 같은 전공인 미국 친구와 룸메이트부터 됐다. 또 주변 환경 모두를 미국적인 것으로 바꿨다. 미국인들과 자주 어울렸고, 최대한 미국 문화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미국인처럼 생각하고, 미국인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어학 실력향상을 위한 수업도 따로 들었다. 뿐만 아니라 듣지 않아도 되는 과목들을 추가로 신청, 청강했다. 사실 전공 과제만으로 벅찼다. 하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기에 포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단 도전했으니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금 무리할 정도로 청강 수업을 신청했고, 빠지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영어에, 미국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할 수 있었다. 언어에 익숙해 진 뒤 스포츠 관련 경험을 쌓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처음부터 쓴맛을 봐야했다. 외국인이라는 신분이 걸림돌이었다. 메이저리그 플로리다 마린즈의 티켓판매 파트타임 공고에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선발 인터뷰를 꽤 괜찮게 했다고 생각한 나로서는 의외였다. 사연을 알아보니 외국인이기 때문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외국인 학생이기에 구단에서 돈을 지불하는 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생활에서 겪은 첫 아픔이었다. ◇치열함으로 살아남다 마냥 아쉬워만 할 수 없었다. 미국인 지도교수와 상의했다. 차후 같은 일이 생길 경우 임금을 합법적으로 받기 위해 인턴십 학점으로 대신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외국인 학생이라는 신분은 계속 발목을 잡았다. 돈이 아닌 경험이 중요했기에 자원봉사부터 시작했다. 여러 일을 경험하고,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만나 인간관계를 쌓아가보자는 생각이었다. 플로리다 마린즈에 인턴으로 일하는 룸메이트를 통해 마케팅부서에서 자원봉사할 기회를 얻었다. 함께 자원봉사를 하는 미국친구들보다 나이가 많았으나 오히려 솔선수범했다. 성실한 자세를 인정받아 미국 프로축구 마이애미 돌핀스 운영팀 인턴으로 일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 무엇보다 경험, 즉 경력을 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미국 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조언하자면 처음부터 남들이 알아주는 일을 시작하기 어렵다. 한국에서는 눈여겨 보지 않던 보잘것없는 일부터 시작해 하나둘 단계를 높여가야 한다. 마이애미 돌핀스 인턴 생활을 하면서 대학 미식축구팀과 메이저리그 플로리다 마린스에서도 파트타임으로 마케팅부서와 홍보부서 일도 했다. 스포츠 매니지먼트 전공자들과 비교하면 경험이 부족하기에 한꺼번에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매일 전공수업과 과제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거의 경험을 쌓는데 투자했다. 개인생활은 포기하다시피 했다. 종종 미국인 룸메이트가 스포츠 바에 함께 가자고 하면 무조건 따라갔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미국 사람들은 한번 제안해 거절하면 싫어한다고 생각해 다음부터 같은 일을 권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그들과 대화하며 어울리는 것도 언어와 함께 미국을 알 수 있는 공부의 연장에 있다고 생각해 과제를 미뤄놓고 따라 나서곤 했다. 일과 과제, 미국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지자 언어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됐다. 영어가 좀 편해졌다. 시나브르 책 읽는 속도가 빨라지고 말할 때도 머릿속으로 먼저 문장을 만들고 하는 일이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운도 실력이다 미국인들이 다 알만한 프로팀에서 인턴 경험을 해서인지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운도 많이 따라줬다. 2003년 플로리다 마린즈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때 팀이 우승했다. 그해 월드시리즈 때 한국에서 취재차 온 한 신문사 특파원을 만나게 됐다. 언론을 돕는 일을 하던 나게 관심을 보이던 그는 통신원 일을 제안했다. 박찬호·서재응·김병현·봉중근·김선우·최희섭 등 한국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활약할 때여서 미국에서 생활하는 한국사람들 중 야구에 관심있는 이들이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현장에서 가까이 있으니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재미있는 소재를 기사화하는 일이었다. 특히 나는 구단에서 직접 일하고 있었기에 좀더 다양하고 가까운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다른 기자나 사람들이 모르는 구단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이야기들도 많아서 타지역 통신원보다 기사 소재를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때마침 2004년 한국인 타자로 첫 메이저리거가 된 최희섭 선수가 플로리다 마린즈로 왔다. 또한번 맞은 행운이었다. 구단 내 한국인이 나뿐이 없었기에 구단에서도 관심을 보였고, 최희섭 선수와도 가까이 할 기회가 있었다. 또 최희섭 선수를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서 온 기자들도 많이 알게 됐다. 그 덕에 6년째 통신원 경험을 이어갈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도전 2005년 5월. 석사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했다. 원래 목표는 미국에서 경험을 쌓고 석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에서 스포츠 매니지먼트 관련 일을 하려했다. 하지만 지도교수가 박사과정을 제안했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으나 교수의 설득으로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스포츠 매니지먼트로 유명한 몇몇 학교에 지원했고, 그 중 가장 가고 싶었던 University of Northern Colorado에 합격하게 됐다. 이때도 석사과정 때 겪은 경험이 합격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University of Northern Colorado에는 세계적으로 스포츠 매니지먼트 학문 인지도가 높은 David Stotlar 박사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 교수 밑에 있으면 어디든 취직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는 취직은커녕 학위마저 따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스포츠 매니지먼트 전공을 시작할 때 마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박사 과정을 충실히 치러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내기는 힘들었지만 통신원 활동을 계속했다. 다행히 다시 한 번 운이 따라줬다. 김병현 선수와 김선우 선수가 메이저리그 콜로라도 로키스로 오게 됐다. 한국인 메이저리거들이 줄어들어 한국 신문사들이 통신원 수를 줄였으나 오히려 나는 반대였다. 콜로라도 로키즈 구단을 오가며 취재도 하고 스포츠 매니지먼트 종사자들과 스포츠 종사자들과 친분을 쌓을 기회를 유지할 수 이었다. 그렇게 나는 6년째 통신원 경험을 쌓으며 가까이에서 스포츠 매니지먼트를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학교 생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주어지는 프로젝트나 일할 기회는 모두 참여했다. ◇사람이 힘이다 2007년 여름. 여느 때처럼 한국행을 생각하고 있을 때 같은 학교 박사과정 중인 태국 친구와 대화하던 중 태국 방콕에서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제대회 경험을 쌓고 싶었다. 태국 친구 도움으로 태국 하계유니버시아드 조직위원회를 통해 자원봉사자로 참여할 수 있었다. 행운도 따랐다. 당시 자원봉사자 중 한국대표팀을 도울 통역 자원봉사자가 나뿐이었다. 거의 모든 종목 테크니컬 미팅에 참여했고, 한국대표팀 감독과 코치들을 알 게 됐다. 그 분들 중 대다수는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스포츠 매니지먼트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더니 많은 관심을 보였고, 명함을 주시며 꼭 연락하라고들 하셨다. 우연찮게 한국 스포츠 관계자들과도 친분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당당히 연락할 수 있게 미국에서 반드시 교수가 돼야겠다는 마음도 먹었다. 의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던 좋은 기회였다. ◇후보는 후보일 뿐이다 드디어 박사 논문을 쓰고 심사를 통과할 즈음 교수 임용에 도전하게 됐다. 미국은 두 개의 웹사이트를 통해 교수 임용 공고를 낸다. 일반적으로 전해 9월에서 11월 사이에 공고를 낸 뒤 지원서를 받고 1차 서류를 통해 5∼10명 정도 후보군을 만든다. 2차 전화 면접을 통해 3차 최종 후보자를 2∼3명으로 압축한다. 최종 후보자는 학교에서 직접 면접을 받는다. 이때 경비는 모두 학교에서 지불하기에 후보자 선정에 신중을 기한다. 보통 8개월에서 10개월에 걸쳐 심사한다. 신문사 통신원 자격으로 미국에서 열린 월드베이스클래식(WBC)과 함께하던 2009년 3월. 최종후보자로 선정돼 미팅날짜를 잡자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당시 세계적으로 경제가 좋지 않았고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내 대형 회사들이 연이어 도산했다. 당연히 미국 내 외국인들이 먼저 일자리를 잃었다. 교육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수 임용 공고를 낸 많은 대학들은 예산 탓에 교수 임용을 내년으로 미뤘다. 그런 편지만을 받던 나로서는 최종후보자 선정 전화에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최종후보자는 후보자일 뿐이다. 교수 임용이 확정된 게 아니어서 그때부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인터뷰 준비를 철저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른 후보자는 미국인. 그보다 내가 언어가 유창할 수는 없다. 일단은 내가 불리했다. '과연 내가 다른 후보자와 비교할 때 어떻게 해야 다른 점을 보여줄 수 있을까?'라고 자나 자신에게 물었다. 결론은 경험이었다. 나는 미국인들도 쉽게 쌓기 어려운 경험을 쌓았다. 그 특별함을 강조하기로 했다. 기본적으로 대학 시절 수행한 여러 프로젝트 리포트와 경력 증거인 기자증과 각종 크고 작은 스포츠경기때 출입증을 준비했다. 한국야구 프로팀들중 한 팀의 외국인 선수를 뽑는 일(스카우트 코디네이터)을 3년째 돕고 있었고, 세계대회인 WBC 때도 통신원과 스카우트 코디네이터를 동시에 수행했다. 그러던 가운데 피츠버그 파이리츠 팀 단장직을 6년 이상 역임한 분과 함께 일할 기회가 생겼다. 대화 중 학교 면접 이야기를 꺼냈고, 그는 흔쾌히 자기가 추천인으로 전화를 해주겠다고 했다. 사실 나중에 추천서를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전화까지 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예감이 좋았다. ◇미국을 이겨내라 드디어 4월 중순 면접을 가게 됐다. 최종 인터뷰 전날 도착해 마음을 다스렸다. 인터뷰는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진행됐다. 교수들과 아침식사를 함께하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최종 인터뷰가 시작됐다. 시범 강의를 한 뒤 1대 1 면접이 시작됐다. 총장·부총장·학장·학과장 등등과 각각 30분씩 면접했다. 면접 뒤 콜로라도로 돌아오니 몸이 쑤시고 좋지 않았다. 마치 무지하게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몸이 처졌다. 몸은 힘들었으나 머리를 맑았다. 학교와 학생, 직원·환경 모두 마음에 들어 이번 기회를 꼭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졸이며 최종 결과를 기다렸다. 최종 면접 2주 뒤 부총장이 손꼽아 기다리던 교수 임용 제안 전화를 해왔다. 이 한통의 전화를 받기 위해 자원봉사부터 시작해 밤낮으로 경험을 쌓은 미국에서의 6년 생활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외국인으로 미국대학 교수가 된다는 현실은 정말 어렵다. 미국에서 6년간 생활하면서 그런 점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올해는 경제 악화 탓에 교수 임용도 많이 줄었다. 경쟁을 해야 하는 사람들도 현직 박사학위를 가진 미국 교수들이나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학위를 받는 다른 학교 우수 인재들이다. 또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박사들도 미국 내 대학 교수 자리를 노렸다. 미국인이 아닌 인재들 중 나와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의 경쟁을 넘어야 했다. 이들 중에는 영어를 모국어로 삼는 이들도 있었다. 또 미국인들도 이겨내야 했다. 솔직히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처럼 힘든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부총장의 교수 임용 제안 전화를 받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한국도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대신 한국에서 경쟁할 때보다 수천 배 이상 노력해야 한다. 내 경험상 외국 특히 미국에서 성공하려면 미국인들보다 뚜렷하게 더 낫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비슷한 능력과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외국인을 뽑지 않는다. 우리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그들보다 말을 잘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다양한 경험을 통해 경력을 쌓고 성실함을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인맥을 잘 형성한다면 일자리를 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