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4년 반 전, 2004년 12월 10일, 인천국제공항에서 가족을 뒤로한 채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딸과 나는 샌프란시스코행에 올랐다.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해서”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꼬집어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딸과 나는 각자 2개의 가방을 들고 기회의 땅, 미국에 도착했다. 주거할 곳은 인터넷으로 이미 예약을 해서 주소만 가지고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도착한 순간부터 진짜 어려움만이 나와 딸에게 손을 뻗치고 있었다. 미국에 도착하기까지의 나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었다. 1996년 12월, 나는 16년간 다니던 서울 을지병원을 사직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분만실 수간호사였었고 이것이 나의 마지막 직장이라고 생각하면서 병원을 다녔었는데 재단측은 경영상의 이유로 병원문을 닫았고 나는 하루아침에 실직을 당했다. 몇개월 후 서울 수유리에 있는 대한병원에 취직이 되어 야간 조산사(midwife)로 일을했으나 지루하고 흥미가 없었다. 밤에 혼자서 일을 해야만 되는것이 몹시 싫었다. 흥미거리를 찾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미국간호사 NCREX RN공부 였다. 1999년 1월, 나는 교대앞에 있는 TOP학원이라는 곳에 등록을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숫자 밖에 없었고 한글은 찾아볼 수 조차 없었다. 영어를 지독히도 하기 싫어하고 어려워 했었던 고교시절이 기억났다. 내가 아는것 이라고는 오직 기초적인 문장의 형식, 주어, 동사 등등 뿐이었다. 나는 영어의 복잡한 형식에 점점 의문이 가기 시작했다. 왜 동사가 한 문장에 2개, 3개 혹은 그 이상 있는지 이해가 도무지 가질 않았다. 해석은 물론이거니와 문장을 읽기도 전에 모르는 단어가 더 많았다. 다행히 선생님들은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수업을 해 주셨다. 수업시간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해석을 책에 받아썼다. 수업 후 원장님께 혹은 desk에 앉아계시는 사무원에게 해석을 부탁하곤 했다. 그땐 미국 간호사가 되기 위한 전문지식이 아닌 영어공부가 우선이었다. 이것을 계속 해야하나 그만 두어야 하나 갈등이 생겼다. 그런데 그 당시 수업비는 장작 99만원. 우리 아이 6개월간 보육비인데 하며 이를 악물고 밤낮 영어공부만 했다. 전철에서도 병원에서도 집에서도... 일요일은 아이를 잠실에서부터 목동까지 친구집에 맡겨놓고 나는 학원에 가서 공부했다. 사람들이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뜻도 없이 공부하니까. 하지만 여전히 미국갈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공부를 시작했으니 끝은 봐야겠다는 생각에 매달려 있는 것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도 사귀고 group study도 시작했다. 주위사람들이 나와 몇명의 group study하는 사람들을 보고 “아줌마부대”라고들 하면서 격려도 많이 해주었고 우리는 꾸준히 열심히했다. 이것이 내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기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그때부터 저 밖 세상에 대해서 듣고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당시, 간호사들이 미국에 가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단다. 모두들 그래서 학원에 등록해서 미국 간호사 공부를 한다고 했다. 알게 모르게 나도 미국에 대해서 조금씩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1999년 7월 미국 visa를 받으려고 신청 했으나 미국대사관으로부터 거부당했다. 하는 수 없이 NCREX RN시험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visa없이도 갈 수 있는 괌에서 보게 되었다. 한번에 합격했다. 8개월간의 피나는 공부 끝에 얻은 소중한 결실이었다. 1999년 8월, 이제 정말 미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니 visa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주위 간호사들이 Saudi Arabia 간호사 모집이 있고 이곳에서 몇년 근무하다 미국 visa신청을 하면 좀 수월하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돌아서라도 미국에 가야만했다. 미국행이 지금의 꿈이라면 꿈을 향해서 돌아서 간들 어떠리하며 ,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Saudi Arabia로 떠날 채비를 하고있었다. 당시 산업인력구조공단에서 Saudi Arabia에 가는 간호사들에게 합숙훈련을 시키면서 3개월간 영어를 무료로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린아이가 있었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사유서를 제출하고 잠실에서 인천까지 매일 수업에9AM-5PM 참석했다. 밤에는 야간 조산사로 일하고 아침 9시에 퇴근해서 전철로 인천까지, 수업 후 또다시 잠실까지 퇴근하기를 3개월간이었다. 다행히 병원근무는 격일재여서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쨋든 이것은 정말 정신력과의 지독한 싸움이었다. 내 나이 43세 되는 2000년 2월 17일, 새벽 4시경 김포공항에서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내 아이는 눈을 비비면서 “엄마, 잘 가” 라는 말만 하고 다시 잠에 들었다. 나는 눈물을 보이지 말자고 마음을 굳게 먹고 작별을 했다. 드디어 미지의 땅, Saudi Arabia에 도착했다. 2월이라 날씨는 시원했으나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무서웠다. 공항에서부터 이 곳 직원들이 사람들을 기죽게 만들었다. 여자들이 시커먼 망토 같은 옷 (Abaya)을 입고 우리를 검문했다. 철저히 여자와 남자가 분리 되어있었다. 자유도 없었다. 화장실도 허락을 받아서 가야만 되었다. 후회가 막심했다. 왜 이곳에 왔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에겐 절실히도 돈이 필요했고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이를 악물어야한다 그리고 견뎌내야한다. 살아야만 한다고 다시 또 한번 다짐을 했다. 미국에 돌아서라도 가기위해선 몇년간 이곳에 있어야만 했다. 1년은 의무였고 그 후엔 미국visa를 받기위해 머무르는 식이었다. 근속기간이 짧을수록 visa가 안 주어진다고 하여 최소 2년간 근무끝에 visa를 신청했더니 겨우 받은게 6개월이었다. 한국에 나와서 내 아이의 비자도 신청했더니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겨우 6개월,아쉬웠지만 기회라 생각하고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2년 후에 다시 나는 사우디에서 미국 비자를 신청하여 2년짜리를 받았고 아이는 운좋게 한국에서 10년짜리를 받아 겨우 마음의 여유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4년간 Saudi Arabia에서의 간호사 생활을 마치고, 2004년 1월 드디어 귀국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영어공부를 하자고 하면서 압구정동에 있는 IELTS 전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 테스트는 TOFEL과 비슷한 시험인데 간호사들이 영주권을 받기위해선 불가피하게 이 시험을 패스해야만 한다. 시험 자체는 4 section (speaking, writing, reading, listening)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고차원적인 영어공부라서 몹시 힘들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학원에 있으면서 수업을 듣고 자습하고 선생님께 물어보며 개인 교습도 받았다. 종합반과 단과반을 오가며 옆도 안보고 공부만했다. 워낙 영어실력이 없어서인지 힘이들었다. Saudi Arabia에 있으면서 혼자서 영어공부를 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Academic English라서 그런지 전혀 쉽지가 않았다. 6개월간 미친듯이 공부해서 첫번째 시험을 봤다. Speaking 6점, writing 6점, reading 5,listening5점. 눈물이 찔끔 할 정도로 형편없는 성적이었다. Speaking은 7.0이 되어야만 하고 평균이 6.5점 이상 되어야만 합격인 시험인데. 1점을 올리기 위해서 얼마나 피땀을 흘려야 하는지 공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때 산업인력공단에서 해외에 가는 간호사들에게 상당액수의 보조금을 지급해줘서 경제적인 면에서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 두번째 시험은 KTX를 타고 친구랑 부산까지 가서 봤으나 여전히 성적은 좋지 않았다. 시간이 자꾸 지나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내 visa도 다 되어가고 아이도 점점 커가고 있었기 때문에 난 결국 관광visa로 우선 미국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당시 간호사들의 에이전시던 RN Solution을 통해서 미국 현지에 있는 병원에 취업이 되었다. 이 병원이 스폰서를 서주기로 되어있어서 무작정 일을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곧장 비행기를 탔다. 우선 샌프란시스코에서 6개월간 머물면서 학원에 다니리 라고 생각하면서 왔으나 학원비가 만만치 않게 비쌌다. 아이만 학원을 한달 보내고 나는 free school과 RN Solution에서 제공해주는 free class-x 쪽으로만 찾아다녔다. 찾아보니 free class-x도 많이 있었다. Community college의 free class-x에 등록해서 3개월간 공부하고 Intrax라는 학원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free class-x를 제공해주어서 열심히 참석했다. 다행히 이때 RN Solution에서도 정부보조금으로 간호사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어서 2개월간 정규 클래스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곳에 있으면서 두번의 시험을 또 봤으나 성적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이 시험뿐만 아니라 운전 면허 시험도 봐야 했는데 47세의 나이에 미국에서 운전연습해서 운전시험 보기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필기시험은 한번에 패스했으나 road test에서 연거푸 3번이나 떨어졌다. 돈도 더이상 없어져만 갔다. 한국에서 떠날 때 가져온 20,000불로 내가 취직할 때까지 아이랑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아이는 한달 후에 public high school에 입학시켰다. 학원비가 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도 영어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매일 전자사전을 들고 다니면서 Chinese친구와 영어로 설명이 안되는 것들은 한문으로 사전을 보여주면서 대화를 하곤했단다. 수학은 용어 조차도 생소하여 몹시 어려워 해서 당시 유학생 언니에게 밥을 해주면서 아이의 수학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었다. 우리는 열심히 살고 열심히 공부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용기있게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모르는게 있으면 질문하는 것을 식은죽 먹듯이 했다. 그래야만 했다. 나에게는 용기는 있었으나 돈이 없었다. 그래서 용기가 재산이었다. 돈의 바닥이 보였다. 그래서 Las Vegas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곳에는 내 스폰서를 서준 병원이 있으니 일만 시작하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6월 30일 2000년, Las Vegas공항에 도착하니 뜨거운 열기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몹시도 뜨겁고 강렬한 태양으로 대지가 끓고 있었다. 마치 우리를 잡아먹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절망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취업이 된 병원, St. Rose Hospital로 부터 일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것이다. “세상에 어찌 이런일이” 라고 하면서 알아본 결과 한국간호사들이 영어를 너무 못해서 의사, 환자, 의료진들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너무 많단다. 상황이 이해는 됐지만 “나는 잘할 수 있는데.. Saudi Arabia에서도 4년간 영어와 아랍어를 하면서 살았는데..”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이당시 영어시험도 패스 못했었고 그나마 있던 스폰서도 잃었으니 앞이 캄캄했다. 이민당국으로부터 더이상 미국에 머무를 수 없으니 이 나라를 떠나라는 통지서도 받았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진퇴양난이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한국에 돌아가도 갈곳이 없었다. 오직 아이와 나 둘이서만 살아야 했고 돈도 더 없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이곳에서 견디기로 했다. 미정부에서 나를 찾아서 쫓아보내지 않는 한 남아있으리라고 하면서 견뎠다. 그리고 불법이어도 좋았다. 살아는 있었으니까. 용기와 배짱이 감사한 순간이었다. 돈이 필요해서 일을 해야만 되었다. 이것 저것 여러사람들에게 물어도 보았다. 그러나 전공을 찾는게 가장 사람 대접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며 yellow book(전화번호부) 책을 뒤졌다. 최근 경력을 살려 보려고 혈액투석 하는곳을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운이 좋게 그곳에서 인터뷰와 이력서를 요구했다. 택시를 타고 50불 (당시 한국돈으로 5만원)이란 거금을 내고 인터뷰를 하러갔다. 멀고 가깝고를 따질만한 아무런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내 영어실력이 모자라는데도 흔쾌히 일자리를 내주었다. Acute dialysis nurse (급성투석 간호사): 아직 한국에는 없지만 미국에서는 전문 간호사로서 간호사가 직접 환자 침대 옆에서 혈액투석을 하는것을 말한다. 환자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미국에서는 환자는 가능한 한 침대에 누워 치료를 받기를 원한다. 그 외의 직원들이 환자 곁에 가서 간호를 한다. 기분이 좋았다. 그로하여 Davita Acute Dialysis Nurse (Davita는 미국전역에서 가장 큰 혈액투석 회사로 알려져있다.)로 취업이되어1주일간 일을하고 세금은 공제한 후 100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았다. 미국 경력이 없어서 초임을 무경력자라고 인정해주어도 기분이 좋았다. 감사했다. 그리고 행복했다. 그래서 언제나 이곳 Davita를 친정 어머니 처럼 생각하면서 일을 했더니 사람들이 나를 몹시좋아 했었다. Las Vegas Davita 에서 한국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일과 인생이 즐거웠다. 살맛도 났다. 3번의 운전시험에서 떨어진 후, 하루는 운전시험을 보러갔다가 시험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받아서 시험을 보기도전에 3개월간 시험자격이 정지되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런 일이 있은 후 4시간동안 운전하여 다시 인근 California state에 가서 시험을 봤다. (나는 이 당시 Nevada state에 살고있었다.) 그러면서 우여곡절 끝에 자동차 운전시험도 패스했다.미국은 주립제도이기 때문에 한 주에서 죄를 짓고 다른주로 가면 법이 같지않아 그 죄가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California 주로 가서 친구의 도움으로 가짜 주소를 대고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아직도 영어시험을 패스하지 못한 상태라 남는 시간만 있으면 공부를 했다. 지독한 독학이었다. 돈이 없어서 학원비를 쓸 수가 없었다. 일을 하면서 환자들과 말을 많이 하려고 애썻고 writing은 일을 하면서 외웠으며 reading은 언제나 어려워서 쉬는날 친구에게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하기를 취업해서 10개월이었다. 2004년 12월에 미국에 와서 2006년 7월, 장작 2년 7개월이란 시간만에 영어시험에 합격했다. 정말 길고도 험한 길이었다. 나는 지금 몹시 행복하다. 1996년 서울을지병원 사직 후 대한병원에서 2년간 야간 midwife를 하면서 1999년 산업인력공단의 도움으로 3개월간 영어공부도 배우고 2000년 2월 Saudi Arabia에 가서 4년간의 외국 경험을 쌓고 영어와 아랍어를 배우면서 새로운 인생을 배웠다. 2004년 1월 귀곡하여 압구정USB에서 1년간 영어공부를 한 후 47살이란 나이에 12월 미국으로 갔다. 6개월간 샌프란시스코에서 free class-x를 쫓아다니면서 공부했고 2001년 6월 라스베가스로 가서 스폰서를 해주었던 병원에서 거부당했으나 다행히 Davita를 만나서 지금은 전문 혈액투석 간호사로 당당히 4년째 일을 하고 있다. 비록8번째의 시도에 영어시험을 합격하고 7번이나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졌었지만 나는 해냈다. 그리고 나의 자랑스런 딸 주현이도 600명이 넘는 졸업생들 가운데서 수석졸업 (Valedictorian)하여 졸업식때 연설도 했다. 지금은 치과대학으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Unviersity of the Pacific의 2학년으로 재학중이다. 비록 길고 험한 길이었지만 나에게 인생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줬던 중요한 시간이었다. 현재는 Las Vegas 에서 Sacramento 로 transfer 되어 같은 Davita 에서 계속 4년째 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병원 직원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미국 생활에 엄청난 만족과 행복을 느끼고 있다. 내 인생을 통해 배운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인생에 shortcut은 없다는것, 그리고 집념과 끈기를 배짱삼아 살아간다면 목표는 언젠가 이룰 수 있을것이라는것. 마지막으로 결코 대단하지 않은 내 경험을 조금이나마 나누게 해줄 기회를 준 산업인력공단 해외취업부에게 감사드리고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